녹색과 갈색 숙취

 

 

 

      

녹색과 갈색 숙취 / Green & brown hangover

60×58×37㎝ / 소주,맥주병 파편 / 2022

 

나는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동시대적 인간의 정서에 지속해서 작품의 주제를 삼고이를 조각의 조형어법으로 표현해 왔다.

<녹색과 갈색 숙취>는  나 자신이나 현대인들이 현대 사회에서 체감하고 있는 주체의 존재론적 관점을 보여준다녹색의 깨진 소주병과 갈색의 맥주병 파편을 집적하여 만든 인물 흉상은 날카로운 술병의 파편물성으로 인해 상징적으로 인간의 고독함과 비애를 드러낸다.  이는 술을 마시며 고통을 토로하고 즐거움을 나누는 서사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술병의 파편을 섞어서 만든 인간흉상은 어쩌면 현실의 희노애락이 투영된 상징물일 수 있다.

이렇듯 <녹색과 갈색 숙취>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우리시대 삶의 정서를 함유하고 상징한다.    

2022년   <작가노트>  

 

 

 


 

 

 

지식 숙취 Ⅰ

 

 

 

  

지식 숙취 1/Knowledge Hangover 1  / 145×115×145㎝/나무에 채색, 맥주병 파편 / 2020

<지식숙취1> 깨진 술병의 파편으로 만든 해골두상과 3개의 연필로 구성된 직립의 인간형상이다.

깨진 유리병에 의한 거친 해골 두상는 3개의 연필로 지탱이 되어 안정감을 취하고 있지만, 형이상학적 지식의 탐구와 현실 인식의 사이에서 피곤한 듯 심리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마치 동시대인들의 부유하는 현실을 상징한다. 이를 테면 인간 삶의 진리가 무엇인가를 의심하고 있는 것인데  욕망의 헛헛함을 가로지르는 현대인들의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2022년    <작가노트>

 

 

 


 

 

 

지식의 꿈  

 

 

 

지식의 꿈 2 / A Dream of Knowledge 2 /

128×118×114㎝ / 나무, 스테인레스 스틸/ 2022

 

<지식의 꿈 2> 화초나 나무화분의 녹색 식물을 연상시키는 연필 화분이다

각기 다른 길이의 녹색 연필에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고,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시대적 사태 변증의 글씨가 각인되어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지식은 끊임없이 자라나고 배양되지만 결정적 지식과 진리의 존재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은 그럭저럭 긍정성의 지향점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결국, 지식의 성장은 순수한 식물의 생장발육과 같은 동질감이 존재한다.   

 

2022년    <작가노트>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지식의 꿈  1,2,3,4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지식의 꿈 1,2,3,4,

Right Now, Wrong Then / Right Then, Wrong Now-A Dream of Knowledge 1,2,3,4

150×197×50㎝ /wood on paint, shovel, pickax, hammer(나무,삽,곡괭이,해머) / 2020

 

나의 작품은 미셀 푸코의 '에피스테메' 해석이 가능한 복합적 상징을 함유한다. 이를테면 사물들에 내재된 인식 체계와 관습을 부정하고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해체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들, 이른바 '그것이 과연 진리이고 옳은 정의인가?'에 관해 존재의 성찰을 바탕으로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묻고싶다.

말하자면, 사유와 철학에 관한 현대인들의 새로운 도전이고 재 인식하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2020년  8

 

 

 


 

 

 

 청춘숙취 2

 

청춘숙취2, Young Hangover 2 / 44×30×44㎝ / wine bottle fragment(깨진 와인병 파편) / 2020

 

깨진 와인병 파편의 집적은 익명의 현대도시인들을 강하고 필연적으로 상징한다.

요컨대, 불확실성의 사회는 늘 지속되어왔다. 그 안에서 젊은 군상들, 다시 말해 청춘들의 존재론적 현상은 알코올 섭취가 필연적일 수 있다. 이것의 체감은 일종의 종교일 수도 혹은 철학적이지 않을까?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와인병 표면은 다중적인 현대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 지금은 틀리다'를  반복적으로 체화하는 지금이기 때문이다. 나는 깨진 술병과 함께 지식,인간의 총체라는 얼굴 결합을 통해 현실 인간적인 조각방법론을 보여주고 싶다.

 

2020년  8월

 

 

 


 

 

 녹색숙취

 

녹색숙취, Green Hangover / 58×55×33㎝ / soju bottle fragment(깨진 소주병 파편) / 2018

 

나는 줄 곧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동시대적 정서에 주제를 삼고, 이를 조각의 조형어법으로 표현해 왔다.

<녹색 숙취>는 최근 지속적으로 천착해 온 현대인 혹은 나 자신이 현대사회에서 체감하는 존재론적 관점을 보여준다. 녹색의 깨진 소주병 파편을 부착하여 만든 흉상인물은 날카로운 유리의 물성으로 인해 고독함과 비애의 현대성을 암시한다. 이는 술을 마시며 고통을 토로하고 즐거움을 나누는 서사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표면의 깨진 소주병 파편은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혹은 대중적인 술병이다.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우리시대 삶의 정서를 함유하고 상징한다. 소주병 파편을 섞어서 만든 얼굴두상은 어쩌면 현실의 희노애락이 투영된 상징물일 수 있다.     <작가노트>

 

2019년  3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안녕하세요 노마드씨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시인 과 촛불     

Right Now, Wrong Then / Right Then, Wrong Now - Poet and Candlelight

170×90×100㎝ / wood on paint, mike stand, iron / 2019

 

나의 최근 작업은 인간을 길고 가느다란 연필로 형상화시켜 물성화하고 사물화 한다.

이미, 재현의 의미로부터 벗어난 인간 형상은 지우개로 된 머리, 가느다란 몸통, 팔 다리로 구조화 되어 새로운 인간 형태로 환원되었다. 이는 인간의 원형질 형상과 인간의 지식이 결합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안녕하세요 노마드씨>는 연필이 상징하는 지각적 의미와 나의 감각적 표현욕구와 결합하여 인간 이성에 함몰된 고착화된 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관점이 투영되었다. 지팡이를 잡고 있는 팔과 불안정한 두 발의 자세는 이를 상징한다.

나는 현실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바탕으로 끊임없는 진리의 세계를 탐구하고 싶다.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적 사고와 진리에 대해 진지한 반문이 필요하다. 그래서 늘 맞고, 틀리고가 순환되는 것이다.     <작가 노트>

 

2019년 3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녹색 바니타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녹색 바니타스

Right Now, Wrong Then / Right Then, Wrong Now -Green Vanitas

22×20×15㎝ / soju bottle fragment(깨진 소주병 파편), polyester / 2019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녹색 바니타스>는 녹색의 깨진 소주병 파편을 통해 고급스럽지도 혹은 저급스럽지도 않은 죽음의 상징을 반영한다. 데미안 허스트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를 패러디하였는바, 다이아몬드의 보석을 대신하여 값 싼 소주병을 가공, 부착하여 평범한 삶을 사는 인간 삶에서 술과 얽힌 희노애락과 생로병사를 다루었다.

동시대인들은 부유하는 현실 속에서 맞지도, 틀리지도 않은 어느 지점인가에 인간 삶의 진리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늘 허전하며 세상의 헛헛함 속에 고뇌하면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부질없는 욕망의 현실 속에서 동시대 현대인들은 존재하지만 부재하는지 모른다.    <작가 노트>

 

2019년 3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시인 과 촛불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시인 과 촛불     

Right Now, Wrong Then / Right Then, Wrong Now -Poet and Candlelight

170×90×100㎝ / wood on paint, mike stand, iron / 2019

 

 

단상위에 커다란 연필이 부착된 마이크스텐드는

대타자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일종의 허구적 욕망 기호다.

이렇듯, 로고스와 파토스의 결합은 늘 진리의 획득을 갈구하는 현실 인간의 욕망코드가 생성된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촛불>

연극과 같은 현실장면의 스틸 컷이다.  

이를 테면, 부유하는 현실 속에서 맞지도, 틀리지도 않은 어느 지점인가에 인간 삶의 진리가 위치하고 있다.

현전하는 부재이듯, 우리는 늘 허전하며 세상의 헛헛함 속에 고뇌하면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2019년 3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Right Now, Wrong Then / Right Then, Wrong Now   

120×180×20㎝ / wood, iron, paint / 2018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적 사고와 진리에 대해 진지한 반문이 필요하다.

우리는 적절치 못한 관념에 사로잡혀 현실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관성적 사고는 늘 존재하고 또 지속되었으나, 그것이 과연 정의로운 가치는 아니다.

조작된 현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존적 현실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부유하는 현실 속에 놓여있다.

그래서 인간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릴 수 있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수 있다

어느 지점에 놓여있다.

 

 

2018년 11월

 

 

 


 

 

미메시스풍경 - 피노키오 스마일

mimesis scene -Pinocchio smile  / 110×330×165㎝ / wood, iron, paint / 2016-2017

 

소리없이 방긋 웃는 '스마일'은 완벽한 행복의 아이콘입니다. 진짜 행복한 표정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밉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미소가 우리에게 감정적으로 즐겁고 행복한 감성을 전달하는지는 한번 쯤 의심해볼만합니다. 왜냐하면 관성적으로 혹은 관념적으로 웃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웃기때문에 행복하다고는 하지만 현대 도시인들은 웃을 일이 많지 않습니다. 특히, 배움이 많아서 '지식이 늘면 고민도 는다'가 적용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작품을 위트로써 그리고 유머있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행복'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마치, 피노키오의 코처럼 '나는 행복해요!'라고 거짓말 하는 것처럼!

          2016년

 

 

 


 

 

mimesis scene-persona

 

  

mimesis scene-persona / 160×90×19㎝ / iron plate(a car bonnet), polyester, paint / 2016

 

<mimesis scene-persona>는 두 가지 기호가 자동차 보닛 표면에 나타난다. 요컨대, 명랑만화 주인공 캔디의 얼굴이 부조로 표현되었고, persona의 문자 언어가 캔디의 얼굴 부조 위에 투사되었다. 중첩된 얼굴, 문자는 화려한 컬러로 채색되어 생기발랄함과 행복감을 더해준다. 충첩의 효과를 통해 구체적인 가면 이미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이 작품의 가면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심사숙고 한다. 이를 테면 대중 이미지인 만화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외적 인격을 인간 정체성의 의문 속에서 상기한다. 열등한 인격인 페르소나는 화려함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일상 앞에 깊이 감춰진 결핍의 무의식인데, 자아의 의식과 외부세계와의 충돌이 투영된다.

이 작품은 현대인의 양가적이고 이중주적인 심리상태에서 늘 행복을 뒤쫓는 가면이다. 행복이 우연히 찾아오길 기대하며, 언제나 완벽한 일루젼(환영) 속에 있길 고대하는 미메시스적인 풍경이 캔디의 얼굴과 persona의 문자로 중첩되었다. 덧없는 속도를 암시하는 자동차의 보닛과 함께

< 2016  작가노트 김석 >

 

 

 


 

 

mimesis scene -Gray man 

 

      

mimesis scene -Gray man / 150×55×245㎝ / wood, iron, paint / 2016

 

이 작품은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을 차용하여 크게 확대한 연필로 만들었다.

<미메시스풍경 회색인간>은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을 재해석 하였는데, 연필 형상을 통해 지식으로 무장한 동시대 현대인들의 공허한 현 존재를 보여준다. 이른바 고독함과 쓸쓸함을 연필이라는 상징(지식인)으로 투사되었다.

가늘고 길게 늘어진 뼈대와 같은 모습은 흡사, 자존감을 간직하려는 결정체의 핵심으로 이해할수 있다.

<2016년 작가노트>

 

 

 


 

 

mimesis scene -centering

mmimesis scene -centering / 88×88×268㎝ / polyester, paint / 2014

 

불안정한 둥근 구 위에 직립의 육체미 인간은 불가피하게 중심을 잡고 서 있다. 육체적 근육 표면에 전사된 색색의 도트 무늬는 마치 희화화된 옷을 입은 것처럼 초라한 사회적 인간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작품 <미메시스 풍경-센터링>은 관성적으로 인식되어 온 인간사회의 힘·권력 의지가 어떤 순간 삐에로나 돈키호테처럼 우스꽝스럽고 초라한 존재 가치로 추락 가능한 것에 대해 역설적인 시각이미지로 구현되었다. 절대적 선과 악의 허구적 존재를 구분하기 어려운 것처럼, 마치 자율과 타율의 이율배반적인 존재적 본질로서의 인간 형상으로 체화된 셈이다. 인간의 가치 혹은 사회적 존재는 급작스런 극의 전환에 적응하듯이 늘 이런 정주되지 않은 범주 안에 놓여있다.

인간의 불완전한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실존의 추구는 이기적인 중심잡기(centering) 행위를 본능적으로 소비한다. 이른바 유토피아적인 감수성에 젖어있다.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심리에서 발현되어 드러난 현대인의 공허하고 나약한 헛헛함과 무의미한 숭고성을 가식 없이 드러낸다.

<2016년  작가노트)

 

 

 


 

 

mimesis scene -happy combat

 

      

mimesis scene -happy combat / 250×500×250㎝(175×94×84) / caster, polyester, paint cloth/ 2014

 

이 작품은 강렬하게 행복을 욕망하지만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인간형상이다.

현실 인간은 관념적인 행복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하고 싶어 한다. 바퀴달린 군인 모습의 인간형상은 현 존재의 삶과 행동으로 치환되었는데, 스마일의 아이콘 깃발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 이데아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이 작품은 전쟁과 같은 현실세계의 헛헛함을 연극적으로 표현한다. 이를테면 행복을 꿈꾸는 유토피아의 추구에 대한 모방적 풍경이다. 나에게도 행복은 스마일과 같이 현실과 먼 관념적 도상이 되기도 한다.

행복은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이데아의 모방 풍경으로 보인다.

< 2016년 작가노트>

 

 

 


 

 

미메시스풍경 - 시간(TIME)

 

           

mimesis scene -TIME / 80×80×17㎝ / iron plate, polyester, paint / 2016

 

<미메시스풍경시간>탄생과 죽음의 아이콘이 오버랩 되었다.

어린이의 형상은 행복한 이상세계를 동경한 일종의 모방적 풍경일 수 있다. 끊임없이 도달하고 싶은 욕망의 저편인 것이다. 그 위 그림자로 채색된 해골 이미지는메맨토모리가 될 것이다. 이런 기호는 아름다움과 추함, 기쁨과 분노가 공존한다.

인간은 항상 완벽하길 바라고 이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세계에 도달하고 싶어 한다. 결국 그곳에 이르지 못하기에, 현실인은 우울함과 쓸쓸함이 끊임없이 체화된다. 나는 이런 것을 조각으로 표현한다.

                2016년  10월

 

 

 


 

 

미메시스풍경 - 왼손잡이

 

       

mimesis scene -Left hander / 110×120×223㎝ / wood, iron, paint, plaster / 2016

 

<미메시스풍경-왼손잡이>는 예술철학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제시한다.

나는 이 작품에서 미켈란젤로의 얼굴(석고상 얼굴)과 색을 입힌 연필 인간형상을 통해 천재 예술가를 오마주한다.

왼손잡이인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바티칸 근위병의 옷 색깔을 차용한 것은 그의 색채에 대한 독특한 점을 확인함이다. 이 작품은 나의 예술적 탐구와 예술에 대한 몇 가지 회의와 의구심이 투영된 작품이다.

나는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동기와 정신성을 동경하지만 도달하지 못한다. 그저 모방할 뿐이다.

           2016년  10월

 

 

 


 

 

미메시스풍경 - 멜랑콜리 맨

mimesis scene -Melancholy  / 207×105×87㎝ / wood, iron, acrylic, paint / 2016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차용하여 현대 도시인의 '생각의 공허함'을 표현하였다.

요컨대 투명 아크릴 구는 인간의 지식에 관계된 머리를 대신하는데, 끊임없이 채우고 싶은 욕망을 결코 채울 수 없는 비어있는 공허로 상징한다.

벽에 부착된 '생각하는 사람' <멜랑콜리 맨>은 공간에 구축되지 않은 불안정한 모습으로서 불안한 인간의 존재를 반영한다.

          2016년  10월

 

 

 


 

 

미메시스풍경 - 호머사피엔스 사피엔스

 

        

mimesis scene -Homo sapiens sapiens  / 230×140×60㎝ / wood, iron, paint, plaster / 2016

 

동시대 현실 인간은 완벽하게 지성적이고 지혜로운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헛헛한 현 존재의 삶과 행동으로 인해 행복한 이데아를 동경할 뿐 도달하지 못한다.

연필로 구성한 이 인간형상 작품은 이른바, 물성적 세계보다 지성적 세계를 꿈꾸는 유토피아의 모방적 풍경이다. 내게 현실은 도달하지 못한 이데아의 모방 풍경으로 보인다.

성찰·지성적 유토피아를 끊임없이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2016년  10월

 

 

 


 

 

mimesis scene - two signs

 

       

mimesis scene - two signs / 70×70×5.5㎝ / stainless steel, gold-plating / 2014

 

작품 표면에 나타난 두 가지의 기호 즉, 웃음과 눈물은 의인화된 휴머니즘의 표정을 상기시킨다.

기존의 관념화된 스마일과 아울러 인간의 감성을 드러낸 눈물의 기호는 서로 충돌하여 두 가지의 기능을 생성시키는데, 이른바 행복의 일루젼을 인식하게하고 또한 현실성을 혼동하게 한다.

이것의 충돌방식은 마치 더블 액션(double action)처럼 형이상학적인 관념과 인간애가 끊임없이 사투를 벌이는 인간 삶의 미메시스적 풍경이다.

             2016년  7월

 

 

 


 

 

mimesis scene -birth

mimesis scene -birth / 136×115×24㎝ / iron plate(a car bonnet), polyester, paint / 2014

우리의 삶과 행동은 행복한 이상세계를 동경한 일종의 모방적 풍경일 수 있다. 끊임없이 도달하고 싶은 욕망의 저편인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움과 추함이 있고 기쁨과 분노가 공존한다. 인간은 항상 완벽하길 바라고 그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세계에 도달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목적이며 아름다움의 진리이긴 하지만, 결국 그곳에 이르지 못하기에 현실인은 우울함과 쓸쓸함이 끊임없이 체화된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그와 대비된 죽음은 이런 것을 함유한다.

<2014년 작가노트>

 

 

 


 

 

미메시스 풍경(mimésis scene)

더블 액션(double action)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일까?   

현상학적 존재의 주변에는 우울함, 쓸쓸함이 묻어난다. 충족된 삶을 지향할 때 더욱 그렇다.

인간은 항상 완벽하길 바라고 그 때문에 이데아적인 세계에 도달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목적이며 아름다움의 진리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곳에 이르지 못하기에 현실인은 우울함과 쓸쓸함이 항상 체화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삶과 행동은 행복한 이데아를 동경한 일종의 모방적 풍경일 수 있다. 끊임없이 도달하고 싶은 욕망의 저편인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움과 추함이 있고 기쁨과 분노가 공존한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세계보다도 보이지 않고 아른거리는 완벽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늘 동경하기 때문에 모방한다. 도달하지 못한 세계는 일루젼이며 현실은 일루젼의 그림자다. 현실은 다름 아닌 모방 풍경으로 보인다.

 

나는 현실세계가 마치 일루젼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보인다. 그래서 더욱더 도달할 수 없는 모방적 풍경으로 보인다. 이것을 증명하듯 우리는 양가적이고 이중주적인 액션을 취하여 행복을 뒤쫓는다. 행복이 우연히 찾아오길 기대하며 언제나 완벽한 일루젼 속에 있길 고대한다. 현재적 삶은 도달할 수 없는 완벽한 세계에 대한 미메시스적 풍경이 아닌가!

 

최근의 부조,입체작품 표면에 나타난 추상적인 기호들, 그러니까 무늬, 기호, 도안들은 얼굴·몸들과 충돌하여 두 가지의 기능을 생성시킨다. 이른바 일루젼을 인식시키는 방식과 현실성을 혼동시키는 방식이다. 충돌의 기능은 마치 더블 액션(double action)’처럼 보이고 변증법으로 형이상학의 표현을 드러내며 기호로 읽혀진다.

요컨대, 일종의 일루젼을 향해 끊임없이 사투를 벌이는 미메시스적 풍경을 보고 있다. 맥락적으로 행복에 관한 미메시스적 풍경인 셈이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우울함과 쓸쓸함은 역설적으로 행복에 대한 변증법이다.

 

나는 현실이 미메시스 풍경처럼 아름답기도 하고 때로는 슬프기도 하다.

작품 곳곳에 문신해 넣은 기호와 아이콘은 희망의 원리를 의식하게 하고 숭고한 행복을 빛나게 한다. 뿐만 아니라 도달할 수 없는 곳을 안내하며 가시적인 것 보다 더 완벽한 세계를 표방한다.

결과적으로 마음의 일루젼을 시각적인 일루젼으로 전치시켜 놓았다.

 

*더블 액션(double action) -회전이 정 중앙을 중심으로 돌지 않고 그 보다 약간 벗어나 편심운동을 한다. 이때 원의 중심과 실재 회전축 간의 거리가 생겨 이중적인 움직임이 생긴다. 환영적인 회전운동을 보인다.우리의 삶과 행동은 행복한 이상세계를 동경한 일종의 모방적 풍경일 수 있다. 끊임없이 도달하고 싶은 욕망의 저편인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움과 추함이 있고 기쁨과 분노가 공존한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세계보다도 보이지 않고 아른거리는 완벽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늘 동경하기 때문에 모방한다. 이르지 못한 세계는 일루젼이며 현실은 일루젼의 그림자다. 현실은 다름 아닌 모방 풍경으로 보인다.

 

 

   2016년  10월

 

 

 

 


 

 

 

 

 

 


 

 

I  AM  HAPPY

나는 정말 행복한 걸까?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웃기 때문에 행복하던,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모습이던 행복은 인간의 마음속으로부터 나온다. 이런 행복의 추구는 인간 누구에게나 ‘시간’처럼 평등하다. 그리고 모방할 수 없다. 지금의 웃음은 행복의 이데아보다 더욱 값진 행복이다.

나는 행복에 대한 예찬을 제거된 이데올로기의 현상 속에서 찾고 싶다. 종교와 인종 그리고 정치적 갈등과 전쟁 등 욕망과 무관한 것에서 행복을 소망한다.

행복의 이데아를 발견하고 싶은 처절함이 내 작품속의 색(Color)으로 다가왔다. 다양한 색 띠와 무늬 그리고 소비사회의 색상 아이콘들은 순간 순간 삶의 환희를 느끼게 하는 상징이다.

그래서 시각적으로 즐겁고 나르시즘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행복함은 역설적이게도 결핍을 메꾸고 싶은 욕구의 충만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를 통한 행복의 충족은 화려한 색으로 위장된것일 수도 있다.

얼굴위에 덧 쒸워진 색 띠와 위장의 무늬는 어쩌면 모조(imitation)된 행복이 아닐까? 그래서 알 수 없는 가면처럼 보인다. 때로는 그것이 고급과 싸구려의 경계위에 놓여있는 물신숭배의 대상물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해!’를 다시 묻고 있다. 나는 정말 행복한 걸까?

       2011년  9월  작업노트

 

 

 

 


 

 

인간ㆍ인간 , 인간ㆍ미술의 소통 

김  석

 

누구와 소통하고 있는가? 무엇(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는가? 왜 소통하고 있는가?  위와 같은 물음으로부터 인간은 자신의 존재이유와 존재양식에 대해 다소 위안적인 해답을 유추 해 낼 수 있다.

특히, 인간 대 인간의 소통은 대상이 있고 매개체를 통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 ‘말’과 ‘글’은 가장 전통적 소통방식의 매개체인데 그 쓰임새 때문에 오해(誤解)와 오독(誤讀)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적 가치 혹은 취미의 생산인 미술작품은 인간과 어떻게 소통될까? 아쉽게도 이 진지한 물음에 대한 해답은 앞서 말한 오해ㆍ오독이 생기는 경우처럼 쉽게 답을 얻을 수 없다. 다만, 동시대 가치 규범에 따라 소통 방식이 달라진다는 점은 확인 가능하다. 이를 테면 과거의 신념이 지금에도 유효하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소통에 관해 말과 글을 매개로한 인간ㆍ인간의 소통 그리고 미술작품을 매개로한 인간ㆍ미술의 일반적 소통방식에 관해 피력 하고자 한다.

 

● 인간ㆍ인간의 소통

동시대 지구촌 인간 군상들의 끝없는 화두 중 하나는 ‘소통’이 아닐까?

특히 열려진 사회에서 개인의 존재감 확인은 어떤 방식이든 커뮤니케이션 접속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나가 중요한 키워드다. 최근 미국 애플사의 스티브잡스는 스마트폰을 출시하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ㆍ최고의 소통방식에 도전장을 던졌고 이에 부응하여 동시대인들은 휴대혼의 진화에 다시금 열광하고 있다.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윈도우는 이미 소통방식에서 구닥다리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아무튼, 현대인들은 어떤 상황에도 구애받지 않고 모든 정보를 교환하고 소통한다. 일찍이 1960년대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는 당시에 이미 복제와 가상현실의 쾌락을 그의 저서《시뮬라시옹》을 통해 증명하였다. 이런 가상현실을 증명해 내거나 가상적 현상과 현실의 가상화를 오락가락하게 만든 것은 소통의 중요성을 간파한 혁신적 사고에서 나왔으며 미래의 소통방식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2009년 12월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만든 영화 ‘아바타’역시 가상적 현실과 현재성의 상호적 교환에 중점을 두었다. 말하자면 어떤 방식이든 소통의 매개를 이용하여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었다는 것이다. 영화 내용 중 원시 ‘나비족’은 대 자연과의 소통을 위해 신경망처럼 연결된 정신ㆍ신경 세포의 연결고리, 즉 소통의 관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간ㆍ인간의 소통에 관한 관심은 이렇듯 다양한 방식의 스펙트럼에 근거하여 소통의 전환점과 접점을 만들어간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 영화  < 아바타 >                                         소설가 이문열

 

소통의 힘은 인간들 뿐 만 아니라 모든 생물체와 사물에게도 유효한 정서적 교감의 에너지다. 이는 비단 어느 특정 분야에 국한된 형식은 아니지만 인간의 삶과 정신적 유대감이 필요한 동시대의 문화적 소통 방식에도 일정한 가치를 부여한다. 그렇다면, 소통적 욕망과 갈구는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좀더, 현실적인 소통방식을 우리 주변으로부터 살펴보자.

현대인의 대표적인 소통방식은 인터넷일 것이다. 인터넷상 가상의 ‘광장’과 이메일 커뮤니케이션은 인간과 인간의 소통방식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필수적이다. 그러나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상의 허구적 혹은 맹목적 소통방식의 글쓰기에서 의외로 소통의 부재가 생성되고 집단적 오해와 착시가 존재한다.

"우리시대 대표적 지성 이문열(한국외대 석좌교수/소설가)은 ‘인터넷 집단 지성의 오해와 착시가 만든 허구’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른바, "인터넷 광장에서 오해와 착시를 활용한 여론 조작과 다수 위장은 '집단지성'이란 허구를 만들어 냈다. 감각으로 수용한 정보의 파편들을 지성으로 착각한 사팔뜨기 지식인들은 대의 민주정치 폐지까지 공공연히 외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2009년 2월20일 금요일 중앙일보 21면에 게재된 글 인용)

위의 글은 소위 인터넷을 놀이삼아 글쓰기를 즐기는 우리시대의 설익은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어떤 사안에 대하여 정확한 진위 여부를 떠나 감각적인 것이 포장된 허위의 논리를 지속적으로 유포하여 진실의 왜곡을 의도적으로 이끌어 내는 방식이다. 예측하면 소통의 오독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인간ㆍ인간의 소통이 어떻게 뒤틀려 전달되고 있는가를 말한다. 또한, “ 인터넷 광장의 착시현상은 소수를 다수로 보이게 하고, 익명성 뒤에 숨은 조작은 터무니없는 소수에게 대표성을 안겨주어 다수로 혼동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실체가 가려진채 컴퓨터 자판으로 인터넷 여론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어하는 비겁함을 말한다. 마치 사악한 약자의 편에 서면 마치 영웅이 된 것 같은 심리를 즐기면서 말이다.

이와 같은 소통의 오해와 오독의 단면은 인간 이성의 미적 감수성과 미적 태도에 관한 반응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심미안적 태도는 결코 사회적 현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기본적 심성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필자는 믿기 때문이다. 미술은 곧 시대의 반응이고 시대의 소산에 근거하기 때문이라는 구시대의 철학자, 미학자의 철학적 사유에 공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인간ㆍ인간의 소통방식 및 그 근거를 이루는 인간학에 관심을 가져보자. 

현 시대는 소통의 부재 혹은 오해ㆍ오독으로 인해 ‘광기(정신착란/madness)’가 스며든 주체성의 소외 인간들이 많이 존재하지 않나 생각한다. 광기는 주체의 객체화가 이루어 지지 않는 오류 때문인데, 프랑스의 지성인 쟈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인간의 무의식이 부적합한 소통방식으로 인해 허구적 욕망의 광기생성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즉 욕망에 대한 이론적 귀결로 볼 수 있다.

                

쟈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                          각인 효과(imprinting)

 

라캉은 인간이 태어나 사회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기호/언어학적으로 증명하였는데 상상계, 상징계, 현실계와 같이 체계적으로 요약하여 설명한다. 이 중 상상계는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면서 발생하는 미 성숙된 자아의 분열 현상을 설명한다. 일명 '거울단계'로 불리는 상상계를 통해 라캉은 소통부재로 인한 인간의 소외와 주체성의 상실로 야기된 광기의 생성에 주목하였다.

거울단계의 어린아이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모습을 허구와 소외로 이해하여 실제의 주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보고 자기 방어의 강한 삐뚤어진 에고가 형성된다고 확신하였다. 즉, 어린아이가 문화적 매커니즘을 통해 언어와 문화적 중재를 거치지 않고 계속해서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상상계속에 머물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되돌아 볼 수 없기 때문에 자기모습을 비친 거울만을 본다는 뜻이다. 이 때 자신을 비춘 거울을 보고 있으면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고 결정적으로 분열된 자아로 인해 광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마치 아돌프 히틀러처럼 스스로 판단한 것이 최고의 '선'인 것으로 착각하여 광기가 나타나며 마구잡이로 살육과 편견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배려의 미덕은 무가치한 용어일 뿐이다.

이렇듯 광기는 자기 자신만을 보기 때문에 주변을 소외시키고, 어떤 누구의 말과 언어의 소통을 이해하거나 보지도 않는다. 이를 테면 나르시즘적 태도로 인해 오인의 인격이 생성된 것이다. 보편적으로 이 시기를 반드시 넘어서야(엄마ㆍ아빠를 인식하거나 주변을 통해) 사회적인 보편적 주체가 형성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히스테리ㆍ광기와 같은 소통의 부재로 인한 폭력ㆍ정신병력ㆍ주체의 상실이 형성된다.

결론적으로 인간ㆍ인간의 상호소통의 부재는 이시대의 젊은 인터넷 집단 지성이나 어떤 개인은 소외된 굴절의 지성들이 자신이 한 때 속한 집단을 광기로서 혼동할 수 있다는 정신병력을 논증하는 것이다. 근대철학의 선구자 칸트 역시《인간학》에서 “광기의 유일한 일반적 증상은 공통감의 상실이며, 자기 자신만의 감각을 논리적으로 고집스럽게 우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ㆍ인간의 소통에 관한 무의식적 관점을 동물학적 관점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거위와 오리는 생후 17시간 이전 자신이 알에서 처음 깨어나서 접촉하였던 사물, 동물을 어미로 인식한다. 이것은 각인효과(imprinting)라고 하는데 '미운 오리새끼' 동화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각인효과’로 인해 소통의 단절과 부재가 얼마나 인간 이성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지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거위, 오리와 같은 각인효과가 나타난다면 어떨까?

단적으로 보면 각인효과는 라캉이 말한 거울단계인 상상계의 초기로 볼 수 있다. 즉 성인이 되기 전에 인간에게 보편적 진리보다 폭력적이거나 비판적인 광기의 인격이 형성되면 비극의 각인이 새겨진다는 것이다. 이는 언어와 문화로 형성된 보편적 질서의 세계인 상징계에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소통이라는 절대 요소가 제거된 것이다.

 

소통의 부재로 인해 일방적인 독선ㆍ독단의 오류가 강력하게 작용하여 결국, 세상 모든 것에 비관적이고 혐오스럽기 그지없고 나 이외의 그 모든 것은 공격의 대상이 되는 인식의 각인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마치 라캉의 오인의 인격 형성과 맥이 닫아있는데, 오리의 각인 효과는 긍정적인 것 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서 더 빨리 그리고 더 강력하게 다가온다.

 

동시대 소통의 주체자인 인터넷 집단 지성은 이런 각인의 교육에서 자유롭지 않다.

인간ㆍ인간의 소통 부재로 인한 광기의 집단 지성은 어디든 존재한다. 이로 인해 반 사회적 욕망은 늘 인간의 상생으로부터 소외된 채 소통부재에 기인하여 오해와 착시 그리고 광기와 같은 커텐과 장막을 친다.

 

● 인간ㆍ미술의 소통

인간ㆍ미술의 소통은 인간과 인간과의 소통방식과 달리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이 지배적이다. 이를 테면 미술가가 표현하고 싶은 것 또는 좋아하는 것과 관람자가 흥미로워하는 것 또는 좋아하는 것과의 괴리감은 여전히 존재하며 심미적 차이가 심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학자나 미술평론가에 의한 해석방식의 차이일 수도 있으나 동시대 미술가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견해가 늘 상존하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미술작품의 미적 이해방식이다. 미술가가 생각하는 미술작품의 소통 의도는 대개 자신의 주체적인 사상과 관점을 관람자에게 설득시키려는 미적 쾌감을 갖는다. 말하자면 미술가가 갖고 있는 내면의 울림이나 지극히 주관적 관점을 시각적 소통방식으로 이해시키고자 고집한다. 미술가는 태생적으로 세상과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고 해석하려는 창조적 욕구ㆍ욕망을 간직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20세기 초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은 대표적인 미술가의 주관적 소통의도였다. 이 때, 그 중심에 서 있었던 미술가는 아무래도 뒤샹이 아닐까 생각한다. 

20세기 초 미술은 극단적으로 창조력을 그 근원으로 삼아 창조적 한계성을 극복하려는 수많은 미술가들 때문에 미술사의 시각이미지는 풍부해졌다. 창조성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은 이전 시대 미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미술가들이 늘 품고 있었다는 것일 것이다. 이와 함께 인간ㆍ인간의 소통방식과 인간ㆍ문명의 소통방식이 혁신적으로 변화된 원인 작용이 있었기 때문에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시금 되새겨 봐야하는 관점이 생성된 것이다.

창조성이 지배적 관점이었다는 것과 미술은 아방가르드적 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매우 흡사하다. 이런 필자의 생각은 19세기 중엽 과학적인 미적 태도로부터 시작된 인상주의 미술에 대해서도 똑 같이 적용할 수 있었겠지만,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미술처럼 극단적으로 치달았다는 관점에서 더 효율적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20세기 초의 경우처럼 혁신적인 미술작품은 관람자를 무시할 수 있는 미술가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부터 시작됐다. 모든 미술은 주관적일 수 있으며, 창조적 태도는 ‘시대를 앞서 간다’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사물과 생각들이 미술시장에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대 보편적인 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창조적 미술은 한 낮 개인의 몽상적인 아이디어를 물성화 시킨 행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품으로서 존재 가능했고 가능하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주 적절한 해답은 바로 인간ㆍ미술의 미적 소통을 간파한 예술학자ㆍ미학자들 그리고 소수의 미술애호가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경제적 가치를 고려한 화상과 화랑들은 뒤샹의 그림과 피카소의 그림들을 좋아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urg, 1909~1994)류의 절대적 형식주의 미술 역시 미술ㆍ인간의 소통방식에서 개인의 주관성과 창조적 미의식에 기댄 결과물이다. 이런 모더니즘 미술은 앞서 언급한 개인적 미적 취향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다.

                           

뒤샹 <샘>,1917년                                                       트레이시 에민 <나의 침대>, 1998년

 

나는 이 지점에서 미술ㆍ인간의 미적 소통방식의 환경적 요인, 즉 어떤 미술의 표현 방식이든 소통 가능한 환경에 대해 부러움과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영국미술의 선두에 서있는 YBA의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1963~)의 작품을 예로 들고 싶다. 그녀의 작품 대다수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설치작품을 제작한다. 널 부러진 옷가지, 침대 그리고 낙서가 휘갈겨진 담요위의 아플리케 작품들은 작가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섹스에 관한 경험 그리고 사랑ㆍ이별에 관한 잡다한 내용이 다수이다. 그녀의 작품<나의 침대>는 아무렇게나 놓여 진 침대와 몇 가지 속옷과 콘돔 등은 근사한 예술작품으로 둔갑하여 관람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거의 쓰레기 수준의 오브제들은 현대미술의 일등공신이 되버린 시점에서 영국의 현대미술에 대한 관점과 오늘날 내가 살고 있는 동시대 대한민국의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부러움의 온탕과 자괴감의 냉탕이 뒤 섞여진다. 이런 이유야 역시 미적인 소통의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또 다른 YBA의 맴버인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1965~ )의 포름알데히드에 절인 무시무시한 돼지 절단작업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당황된다. 이런 상황을 다시금 기억하자면 인간ㆍ미술의 미적 소통에 대한 관대함이 남다른 영국미술의 상황에 왠지 필자는 씁쓸하다. 이 밖에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주창한 모더니즘의 미술 역시 트레이시 에민의 생각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테고 주변의 미술환경 역시 동일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두 번 째, 필자는 경제적 가치의 생산ㆍ소비의 관점에서 인간ㆍ미술의 소통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미술가는 경제력의 시대적 사명에 부응하는 소통(금전과의 교환)친화적인 미술가 이기도하다. 대개 이 부분은 상업 화랑과 속물근성의 사명을 스스로 잘 이해하고 해석하는 미학자ㆍ미술 비평가들도 함께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이다.

‘미술품은 반드시 경제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관점은 미술품을 생산하는 작가의 몫보다 화상이나 미술품 딜러의 몫이 더 클 것이다. 이는 동시대 인간ㆍ미술의 상호성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동시대 미술은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미술은 생산과 소비라는 경제적 소통(유통)방식의 룰(시장)로 라인업이 형성되어 급격히 이동하였다.

미술과 돈의 상호성에서 실질적으로 자본의 힘은 미술계의 권력을 주도한다. 미술가에게 자본의 달콤함은 일정 부분 인간ㆍ미술의 미적인 소통방식을 변질ㆍ왜곡 시킬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미술가의 주체적인 사상과 관점을 관람자에게 설득시키고자 하는 미적 태도’에서 아주 멀어진다는 얘기다. 이를 테면 미술가의 정체성에 관한 본질적인 물음이기도 하거니와 궁극적으로 미술의 창조적 한계에 대한 전면적 도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성(상업성)을 외면한 채 오직 창조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미술가의 노력은 어떻게 해석 가능할까? 예를 들어 스스로의 창작의지에 대한 만족도가 너무 커서 현실적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미술가가 아무도 봐주지 않는 곳에 미술품을 만들고 전시한들 그의 창조적 능력은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스스로 만족하고 희열감과 쾌감으로 인해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인가? 이럴 때 소통(대중과의 교감과 상업적인)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인간ㆍ인간의 소통 면에서 라캉의 상상계를 통한 인간의 사회성 결여는 어떻게 광기로 연결되는가를 앞에서 설명하였다. 그러니까 소통(말과 글)의 부재는 극단적으로 사회적 진실을 왜곡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원인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되새겨 보면 미술가는 창조적 한계와 사회적 소통의 대극에 있으며 늘 극복해야하는 위치에 서있다.

인간ㆍ미술의 소통에서 경제적 소통중심의 미적 태도, 이를테면 미술품이 재화 생산의 수단으로 둔갑하는 현상을 견지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수단이 목적으로 전도된 경우이며, 기술적으로 잘 만든 것 혹은 상품성이 뛰어난 것을 포함하여 인간의 일상성(narrative)이 적나라한 재현된 것이 다수 포함 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와 같은 경제적 소통을 중시하는 미술품들은 아우라(Aura)가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창조적 가치가 녹아들어있지 않은 민속(토속)적인 미술품을 말한다.

오늘날 많은 무리의 동시대 미술가들은 위와 같은 미적 관점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미술작품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창조성의 가치를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이 부분에서 위험천만한 사실은 미술가의 태도와 역할이 상품성을 지향하는 인위적 방향성(과도한 상업주의 미술시장)에 녹아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영국의 트레이시 에민이나 데미안 허스트는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이 점은 지역적 정서의 인간ㆍ미술의 소통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겠다. 

인간ㆍ인간의 소통과 인간ㆍ미술의 소통에 대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정의하기에 매우 심오하다. 그리고 타당한 인간학이 숨어있다. 동시대 인간에 대한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는가에 따른 결과론 때문이다. 아무튼 필자는 짧은 글을 통해 동시대의 다양한 소통에 대해 소고(小考)하였다.

몇 가지 중요한 점은 변화무쌍한 인간 삶과 소통방식의 적절한 상호성은 개인의 의식과 사회의 몫에 늘 달려있다는 것이다.